| ... | ... | |
|---|
| 215 | 215 | 소식이 전해진 그날, 루이나 의회는 회기를 중단하고 베렌하르트의 전문 전문(全文)을 낭독했다. "1941년 5월 27일 10시 39분, 함대는 약속을 지켰다." 사흘 전 "귀항하지 않는다"던 그 전문의 대구였다. 거리에는 호외가 뿌려졌고, 리퍼블릭 승조원 유족들이 항구에 모여 바다를 향해 헌화하는 사진이 이튿날 모든 신문의 1면을 채웠다. 그러나 축포의 이면에서 해군 수뇌부의 결산은 훨씬 건조했다. 최신예 전함 하나를 잡기 위해 동원된 것은 주력함 7척과 항모 2척, 순양함과 구축함 수십 척, 그리고 나흘의 시간이었다. 그 나흘 동안 호위를 뜯긴 선단들이 대서양 곳곳에서 무방비로 항해했다는 사실, 그리고 결정타가 전함의 주포가 아니라 시속 130km 복엽기의 어뢰 한 발이었다는 사실은 각기 다른 방향의 교훈을 남겼다. 어쨌든 하나의 시대가 이날 끝났다. 독일의 대형 수상함이 호위 없이 대양을 활보하던 시대, 그리고 '위치 불명의 전함'이라는 세 글자가 루이나를 마비시키던 시대였다. 다만 그 관에 마지막 못이 박히기까지는, 아직 반년의 소모전이 남아 있었다. |
|---|
| 216 | 216 | |
|---|
| 217 | 217 | === 잔존 함대의 항구 봉쇄와 항공 소모전 (1941년 6월~8월) === |
|---|
| 218 | 보탄(KMS Wotan)의 침몰은 끝이 아니라 청소의 시작이었다. 바다 위에는 아직 독일 수상함대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추격전의 그늘에서 빠져나간 중순양함 롤란트(KMS Roland), 프랑스의 항구에서 수리 중인 고속전함 2척, 그리고 무엇보다 대양 곳곳에 숨어 이들의 작전을 떠받쳐 온 보급함망이었다. 란츠의 상황실은 보탄 격침 다음 날부터 곧바로 다음 표적을 이 보이지 않는 혈관으로 옮겼다. 겨우내 복기한 뤼첸스의 항적, 노획 문서, 그리고 이 무렵 결실을 맺기 시작한 독일 해군 암호의 해독 성과가 겹쳐지면서, 상황실의 지도 위에는 대서양에 점점이 뿌려진 보급함들의 대기 해역이 하나둘 표시되어 갔다. |
|---|
| 219 | |
|---|
| 220 | 6월 한 달간 벌어진 이 '혈관 절제 수술'은 전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조용하고 가장 치명적인 작전이었다. 순양함 전대들이 지도 위의 좌표를 하나씩 방문했고, 유조선과 보급함, 기상관측선까지 도합 9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포성이 거의 울리지 않은 이 소탕전의 전략적 의미는 명확했다. 독일의 대형함이 대양에서 작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사전 배치 보급망 덕분이었는데, 그 그물이 통째로 걷힌 것이다. 이후 독일 수상함의 항속거리는 문자 그대로 연료 탱크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다만 이 성공은 값비싼 부작용을 남길 뻔했다. 암호 해독으로 위치가 파악된 보급함들이 너무 정확하게, 너무 한꺼번에 사라지자 독일 해군 일각에서 암호 체계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것이다. 조사 끝에 독일 측은 원인을 첩자와 우연으로 결론지었으나, 이 소동 이후 루이나 정보 당국은 해독 정보의 사용 규범을 대폭 강화해, 이후로는 해독으로 안 사실에는 반드시 정찰기의 '우연한 발견'을 연출해 덧씌우게 된다. |
|---|
| 221 | |
|---|
| 222 | 한편 단독 통상파괴에 나섰던 롤란트의 항해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기관 고장에 시달리며 대서양을 배회했으나 소탕전으로 보급선이 끊긴 탓에 상선 단 한 척도 잡지 못했고, 6월 초 연료가 바닥나기 직전 프랑스의 군항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로써 독일 해군의 가동 가능한 대형함 전부, 즉 고속전함 2척과 중순양함 1척이 한 항구에 모이게 되었다. 지난겨울 루이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함대가 이제 부두에 나란히 묶인 채 수리 순번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인데, 연합군의 시각에서 이는 위협인 동시에 기회였다. 바다에서 그토록 잡기 어려웠던 배들이, 지금은 좌표가 고정된 표적으로 정박해 있는 것이다. |
|---|
| 223 | |
|---|
| 224 | 그리하여 여름 내내 이 군항 상공에서는 또 하나의 소모전이 벌어졌다. 루이나와 영국의 폭격기대는 6월부터 8월까지 이 항구에 연 1,500소티가 넘는 폭격을 퍼부었고, 독일 측은 대공포대와 요격기, 연막 발생기로 항구 전체를 요새화하며 맞섰다. 폭격의 산수는 얼핏 연합군에게 불리해 보였다. 명중률은 소티당 1%를 밑돌았고, 여름 동안 잃은 폭격기는 60기가 넘었다. 그러나 그 1%가 꽂힐 때마다 수리 일정은 몇 주씩 뒤로 밀렸다. 7월 초의 야간 폭격에서는 철갑폭탄 1발이 고속전함의 갑판을 뚫고 들어가 기관구역에서 작렬해 수리 완료 예정일을 단숨에 넉 달 뒤로 보내 버렸고, 승조원들을 함에서 내려 육상 숙영시키던 독일 해군의 조치가 무색하게 정비 인력의 손실도 누적되어 갔다. 폭격이 격침에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은 연합군 내부에서도 있었으나, 란츠의 반박이 이 작전의 본질을 요약한다. "격침할 필요 없다. 저 배들이 바다에 없는 하루하루가 우리의 전과다." |
|---|
| 225 | |
|---|
| 226 | 이 여름의 진짜 승부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갈리고 있었다. 독일의 대형함들이 부두에 묶여 있던 석 달 동안, 란츠 개혁의 열매들이 차례로 바다에 나온 것이다. 표준 화물선의 양산이 궤도에 오르며 6월부터 신규 건조 톤수가 처음으로 월간 손실 톤수를 넘어섰고, 상설 호위전대는 편성표 속 유령 부대에서 실체를 갖춘 전력으로 바뀌어 갔다. 호위 전용으로 설계된 소형 항모 1번함이 취역해 선단 상공에 처음으로 상시 항공 엄호가 제공되기 시작한 것도 8월의 일이다. 겨울의 뤼첸스가 헤집고 다녔던 그 바다는 반년 만에 전혀 다른 바다가 되어 있었다. 독일 해군도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수뇌부가 매달릴 수 있는 희망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수리가 끝나 가는 두 척의 고속전함, 그리고 그들이 한 번 더 기적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였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
|---|
| 218 | 227 | === 중순양함대의 마지막 출격 (1941년 9월~10월) === |
|---|
| 219 | 228 | === 랜드 내해 북부 해전과 종결 (1941년 11월 27일) === |
|---|
| 220 | 229 | |
|---|
| 221 | 230 | == 결과 == |
|---|
| 222 | 231 | |
|---|
| 223 | 232 | == 영향 == |
|---|